Home  |  로그인  |  회원가입   
 
 
   

 
 
  1910년(32세)
안의사 관동도독부 지방법에서 공판 개시되다. 1월 31∼2월 1일경부터, 일본의 검찰관과 옥리들의 심문태도가 강압적으로 돌변하고 안중근에게 공판개정일이 6∼7일 뒤로 결정되었다고 통보하다. 또한 이미 허가한 한국인변호사의 변호는 물론 영국, 러시아, 스페인 등의 외국변호사도 일체 변호가 허가되지 않으며, 일본인 관선변호사만이 허용된다는 사실을 통보하다.

여순공판 개정되다. 1910년 2월 7일 오전 10시, 중국 여순 관동도독부 고등법원 제1호 법정에서 재판장 眞鎬十藏의 단독심리하에 安重根, 禹德淳, 趙道先, 劉東夏, 등 하얼빈 의거 관련자 4인에 대한 제1회 공판이 열리다. 재판부는 재판장에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장 眞鎬十藏, 담당검찰관은 溝淵孝雄, 관선변호사는 水野吉太郞, 田正治, 서기 渡邊良一로 전원 일본인 일색으로 구성하다. 이 공판에서 우선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 네 피고인의 인적사항 확인 다음 안중근에 대한 신문이 전개되다. 안중근은 "3년전부터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등을 포살코자 했으며, 이 거사는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결행하는 것이다."라고 진술하다.

2월 8일 오전 11시, 제2회 공판이 속개되어 우덕순과 조도선에 대한 개별신문이 행해지다. 우덕순은 하얼빈 의거에 참가한 이유를 "안중근은 의병으로서 한 일이겠으나 자신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하고 진술하다. 조도선은 정대호가 데리고 오기로 되어있는 안중근의 가족을 마중 나갈 때 러시아어 통역을 도와주기 위해서 안중근과 채가구로 동행하였다고 진술하다.

2월 9일 오전 9시 50분, 제3회 공판이 개정되다. 먼저 유동하에 대한 개별신문이 행해지다. 유동하는 안중근의 거사 의도를 몰랐다고 진술하다. 오후부터 재판장의 증거취조가 행해져 안중근이 李剛에게 보내려던 편지와 안중근, 우덕순의 詩歌 러시아와 일본 관헌에 의해 밝혀진 사실들이 제시되다. 여기서 안중근은「伊藤博文罪惡」15개조를 설명하다. 중도에 재판장에 의하여 중지 당하다.

2월 10일 오전 9시 40분, 제4회 공판이 시작되다. 溝淵 검찰관으로부터 각자에 대한 형량이 구형되는데 안중근은 사형, 우덕순, 조도선은 징역 3년, 유동하는 징역 1년 6개월이 구형되다.

2월 12일 오전 9시 30분, 제5회 공판이 개정되다. 두 일본인 관선 변호사의 변론이 행해지다. 田 변호사는 주로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에 대해 변론하고 水野 변호사는 안중근에 대하여 변호하다. 변론이 끝난 후 피고인들의 최후 진술에서 안중근은 일제의 침략적 간계를 규탄하면서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이등박문을 제거했다고 진술하고 자신을 단순한 자객으로 취급하지 말고 전쟁중에 잡힌 포로로 대접하여 마땅히 만국공법에 의하여 처리하라고 진술하다.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제6회 공판(최종판결)이 개정되다. 재판장은 일본 형법을 적용시켜 안중근에게 사형, 우덕순에게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에게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하다. 이러한 선고를 받고도 안중근은 "이보다 더 극심한 형은 없느냐"고 말하면서 시종일관 의연한 자세를 취하다.

1910년 3월 8일, 한국으로부터 여순감옥으로 빌렘 신부가 찾아오다. 다음 날인 9일부터 10일까지 빌렘 신부가 안의사의 영생영락을 위하여 告解聖事와 彌撤聖祭大禮, 예수의 聖禮聖血을 받아 모시는 대예식을 행하다. 안중근은 이 미사 중에 직접 복사를 하고 성체를 받아 모시다. 이때 감옥소의 일반관리들도 함께 참례하다. 면회실에서 溝淵 검찰관, 栗原 전옥, 園木 통역, 中村 간수장, 水野, 田 두 변호사 등이 입회하에 안정근, 안공근 두 아우와 빌렘 신부를 면회하고 20분 동안 기도를 드린후 동포에게 고하는 최후의 유언을 남기다.

1910년 3월 15일, 안중근은 자서전 『安應七歷史』를 탈고하다. 안중근은 지난 1909년 12월 13일부터 집필하기 시작한 그의 자서전 『安應七歷史』를 92일만에 탈고하고, 『東洋平和論』을 쓰기 시작하다. 한편 이 무렵부터 안중근은 「國家安危勞心焦思」,「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등 한문붓글씨로 된 많은 유작을 남기기 시작하다. 안중근이 갇혀있는 감옥소에 관계하던 많은 일본인들이 비단과 지필묵을 가지고 와서 안의사에게 기념소장할 붓글씨를 써줄 것을 부탁하다.

안중근은 25일 동생 정근과 공근을 마지막 면회하는 자리에서 모친과 부인, 숙부, 동생, 뮈텔 주교, 빌렘 신부 등에게 미리 써놓았던 6통의 유서를 전하다. 이 보다 앞서 安秉瓚 변호사를 통하여 뼈에 사무치는 동포에게 고하는 유언을 전달하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의사 여순감옥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하다. 안중근은 전날 고향으로부터 보내온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형장으로 나아가기 전에 약 10분간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 임형직전 마지막으로 남길 유언을 묻는 검찰관의 물음에, "나의 거사는 동양평화를 위해 결행한 것이므로 임형관리들도 앞으로 한일간에 화합하여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고 하고 이 자리에서 함께 '동양평화만세'를 부를 것을 제기하자 반대하고 교수형을 집행, 안의사는 의연하게 순국하다. 안중근의 시신은 새로 송판으로 만든 침관에 안치된 후 여순감옥 묘지에 권폄(權)되다.
 
 

......................................................................................................................................

 
 
 


서울시 금천구 가산동 550-15 TEL:02-2000-1916~7 FAX:02-793-9553 Copyright ⓒ 2002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 All rights reserved.
  • UPF 연수팀 관동법원 방문
  • 9월 11일, UPF 통일기원 평화통일 지도자 백두산 연수팀(단장:전남 광주지역 김진회회장) 42명이 관동법원을 방문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