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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8년(30세)
안중근은 연해주의 한인촌을 순회하면서 同義會 회원을 모집하기 위하여 유세작업을 벌이다. 이에 다수의 한인들이 호응하여 무기, 자금 등을 지원하자 마침내 국외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총독에 金斗星, 총대장에 李範允을 추대하고, 안중근은 參謀中將의 임무를 맡다. 이들은 군기 등을 비밀히 수송하여 두만강 근처에서 모인 후 국내진입작전을 도모하다.

안의사 300여 명의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국내진입작전을 벌이다. 7월(음력 6월), 안중근 등 여러 의병장이 대를 나누어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 부근 홍의동과 신아산 부근으로 진공하다. 안중근 부대는 몇 차례 승첩을 올리고 일본군인과 상인 등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리다. 안중근은 만국공법에 의거하여 포로들을 석방하면서 무기까지 내어주었다. 이 때문에 동료의병들과 논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 중에서 부대를 나누어서 떠나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석방한 포로들에 의해 일본군에게 위치가 노출되면서 기습공격을 받고 會寧 靈山에서 일군과 약 4∼5시간 큰 접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퇴하다. 안중근은 수명의 의병과 함께 일본군을 피해 달아나면서 열이틀 동안 단 두끼만 겨우 얻어먹는 등 곤경을 겪으며 연추의 의병 본거지로 돌아가다. 일본군을 피해 도망하는 동안 안중근이 2명의 의병에게 代洗를 주다.

안중근이 블라디보스톡에서 의병의 재기를 도모했으나 여의치 못하다.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톡에서 수청, 하바로프스크 등을 순회하면서 각지 한인사회의 교육과 사회 조직 건설에 힘쓰다. 특히 기선을 타고 흑룡강 상류 수천 여리를 시찰하다. 그러던 중 어느 산골짜기에서 일진회 회원들에게 잡혀서 구타를 당하고 죽음의 위기에서 간신히 풀려나 친지 집에서 상한 곳을 치료하며 그 해 겨울을 지내다. 이 무렵 안중근이 1906년경부터 1907년 초까지 진남포에서 운영해 오던 삼흥학교는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하여 진남포의 五星學校의 야학부로 재편되다. 8월 20일 황해, 평안 양도의 50여 학교 5,000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개최된 연합운동회에서 1906년부터 1907년까지 안중근이 재건에 힘쓴 진남포의 돈의학교가 우등을 차지하다.


1909년(31세)
안의사 斷指同盟을 통해 同義斷指會를 조직하다. 3월5일경(음력 2월 7일경), 안중근은 연추 하리에서 11명의 동지와 함께 모여 왼손 무명지를 끊어 그 피로 '大韓獨立'이라는 네 글자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치며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조국의 독립회복과 동양평화유지를 위해 헌신하는 동의단지회를 결성하다. 안의사가 회장에 선임, 회무를 주관하다.

단지혈맹동지 12명
安應七(31세) 金起龍(30세) 姜順琦(40세) 鄭元柱(30세) 朴鳳錫(32세) 劉致弘(40세) 趙應順(25세) 黃丙吉(25세) 白奎三(27세) 金伯春(25세) 金千華(26세) 姜昌斗(27세)

안의사 「人心結合論」을 발표하다. 3월 21일, 『海朝新聞』에 '安應七'이란 이름으로 기서하여 인심을 단합하여 국권을 회복하는 방략에 대하여 논하다.
안의사 하얼빈 의거를 결의하다. 10월초, 海蔘威에서 소문과 신문을 통해 伊藤博文이 22일경에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거사를 결심하다. 안중근은 禹德淳과 동행의거를 제의하고, 우덕순도 쾌히 동의하다.

안의사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하얼빈에 도착하다. 10월 21일, 아침에 안중근, 우덕순은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하얼빈으로 향하던 중 綏芬河 지방에서 내려 통역을 맡아 줄 유동하와 동행하다. 22일 하얼빈에 도착하여 金聖伯의 집에서 유숙하고 다음날 조도선을 찾아가서 함께 거사를 동모하다. 대동공보사 주필 李剛에게 거사결행과 자금에 관한 편지를 쓰고 거사의 결의를 읊은 '장부가(丈夫歌)'를 짓고, 우덕순도 이에 화답하여 '擧義歌'를 짓다.

안의사 일행 의거지를 선택하고자 蔡家溝역으로 가다. 10월24일, 아침에 안중근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 정거장으로 나가서, 역의 관리를 통해 러청 열차가 서로 바뀌는 정거장이 蔡家溝 등지임을 알게 되다. 유동하는 남아서 연락을 담당하게 하고, 우덕순. 조도선과 함께 채가구 역에 이르러 하차하다. 안중근 일행은 이등박문이 10월 26일 아침 6시경에 이 곳(채가구)을 지날 것이라는 사실을 정거장 사무원을 통해 확인하다.

10월 25일, 안중근은 거사의 만전을 위하여 채가구를 거사의 한 지점으로 정하여 우덕순, 조도선 등에게 맡기고, 자신은 하얼빈으로 돌아와 하얼빈역을 의거지로 작정, 거사준비를 하다.

10월 26일(음력 9월 13일), 채가구에서 거사를 도모하던 우덕순, 조도선은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수상하게 여겨져, 열차가 지나가는 시각에 그들이 투숙한 역 구내여관의 문을 잠궈 방안에 갇혀 있다가 거사를 실패한다.

안의사 하얼빈 역두에서 伊藤博文을 총살응징하다. 안중근은 오전 7시경 역으로 나가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역사안 찻집에서 伊藤의 도착을 기다리다. 오전 9시경 이등을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자 러시아 코코프췌프 대장대신이 기내영접을 하다. 약 20분 뒤 伊藤이 수행원을 거느리고 코코프체프의 안내를 받으며 열차에서 내려 도열한 의장대를 사열하고 이어 각국 사절단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받기 시작하다. 이때 안의사는 9시 30분경 러시아 의장대 뒤쪽에 서 있다가 약 10여보의 거리를 두고 선 자세로 브로닝 권총을 발사하여 이등에게 3발을 명중시키고, 이등을 수행하던 하얼빈 川上 총영사, 森 비서관, 田中 만철 이사 등에게 부상을 입히다.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에 의해 체포되자 '코리아 후라(대한국 만세)'를 3번 외치다. 거사 직후 러시아 헌병대에 체포된 안중근은 하얼빈역 헌병대 분파소에서 러시아 검찰관에게 심문을 당하다가 오후 8, 9시경에 일본영사관으로 넘겨지다.

치명상을 입은 伊藤은 곧 러시아 장교들과 일본인 수행원들에 의해 열차 내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약 20분 후에 69세로 절명하다.

안의사 일제관헌으로부터 본격적인 심문을 받기 시작하다. 10월 30일경,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에서 溝淵孝雄 검찰관의 심문을 받기 시작하다.

안의사 관련 연루자와 함께 旅順 關東都督府 감옥으로 이감되다. 11월 1일, 일본헌병과 러시아 헌병의 감시하에 안중근은 禹德淳, 趙道先, 劉東夏, 鄭大鎬, 金成玉 등 9인이 旅順 감옥으로 향하다. 11월 3일, 여순구에 이르러 감옥에 수감되다.

일본정부 관동도독부 법원에 안의사 '사형'을 지령하다. 12월 2일 小村壽太郞외무대신이 현지 파견중인 倉知鐵吉정무국장을 통하여 '重刑懲罪'을 전보로 명령 전달하게 하고 나아가 고등법원장 平石氏人을 본국으로 소환해 '사형판결'을 위한 공판 개정을 다짐받았다.

12월 중순, 안중근의 동생 정근, 공근이 여순감옥으로 안중근을 면회오다. 안중근은 국내에서 찾아온 두 동생을 4∼5일만에, 혹은 10여일만에 차례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이 자리에서 안중근은 한국인 변호사를 청해 올 일과 천주교 신부를 청해다가 종부성사 받을 일들을 부탁하다. 또한 안중근이 자신의 자서전 『安應七歷史』를 집필하기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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